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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선생 생애
[수정하기] [수정하기] 홈 > 남강선생 존영 > 남강선생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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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유년기(幼年期)

가난 속에서도 지식과 학문을 쌓고 기업 경영의 기본 이론을 익히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를 대비한 착실한 준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출생 (1864)

     

      3월 25일 (음 2월 18일)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定州)에서 출생

 

6세  (1896)

 

       정주(定州)에서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를 하고 7세부터 11세까지 서당에서한문(漢文)        을 배웠다. (동몽선습, 무제시, 소학, 맹자 등)

 

10세 (1873)

 

       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된 남강는 학업을 중단한 채 생계를 꾸려야 했        다. 그래서 임일권(林逸權)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방사환(房使喚)으로 일하게 되었다.

 

11세(1874)

 

       남강은 14세까지 임일권의 집에서 있었는데 임일권은 유기 상공업을 하는 사람이었으        므로 여기에서 유기 제조공정과 상업 경영의 거래 기술을 익혔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성실과정직함을 인정받아 수금원의 직책을 맡기도 했다.

 

나. 사생활(私生活)의 성공

이 시기에는 보부상을 시작으로 유기 공장 운영과 판매, 무역상과 운수업을 하는 등 그의 경영능력과 성실성을 충분히 발휘하여 재게에 이름을 떨쳤다. 즉, 개인 남강(南岡)으로서 그의 기업 능력을 통하여 대성한 성취의 시기였다.

 

15세 (1878)

 

       그는 이도제의 딸인 이경강씨와 결혼을 하고 자립하여 보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특히 남강(南岡)은이 시기에 정주와 황해도를 돌아다니며 장사뿐 아니라 자연과 지리에        대한 견문도 익히며 여러 사람을 사귀었고 나라 안,밖의 소식들도 접하게 되었다.처음에        는 정주, 납청, 고읍에서 장사를 하다가 점차 평안도 일대를 다니게 되었고 나중에는황해        도의 안악, 재령, 봉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23세까지 보부상으로 착실한 기반을 닦았        다.

 

24세 (1887)

 

       보부상을 청산하고 납청정(納淸亭)에 들어와서 오희순(吳熙淳)이라는 유지의 도움을 받        아 유기 공장과 상점을차려 사업을 시작했으며,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면서 상점 경영에        힘을 기울였다.특히 남강의 유기 공장은 환경 조건이나 노동자 처우에 있어서 매우 모범        적이었기에 타 공장과 비교되기도 했다. 한편, 오산(五山)의 용동(龍洞)에다 이(李)씨의        친족촌을 만들고 서당을 마련하여 자제들의 교육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31세 (1894)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터가 되었던 황해도와 평안도는         이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남강도 힘 없는 나라의 백성이었기에 그 동안 쌓은 노력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그의 신용과 정직함을 아는 오삭주(吳朔州=오희순)의 계         속적인 도움으로 이듬해에 재기하였다.

 

35세 (1898)

 

       청일전쟁(淸日戰爭)후 5년만에 그는 벌써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납청정(納淸        亭)과 진남포(鎭南浦) 등에 지점을 두었으며,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하여 국        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南岡은경인선(京仁線)을 비롷산 철도의 개통과 외국 상선        이 입항할 것을 미리 알아 운송 사업을 개시했는데 서울과 평양에 설립한 운수회사는 우        리 나라 운송 사업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43세 (1906)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그는 모든 자본과 경영권을 정리하고        재게에서 은퇴하여 용동(龍洞)으로 돌아왔다. 이는 망국의 한을 느끼고 시국의 아픔을        본 것으로 이런 태도는 그의 사생활을 정리하고 공생활로 탈바꿈하는 준비 시간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 공생활의 업적

 

44세에 도산(島山)을 만난 것을 계기로 사생활을 청산하고 민족을 위하여 교육과 종교, 민족 운동과 사회 사업을 한 공생활의 시기이다.

 

44세 (1907)

 

      헤이그 밀사 사건과 고종(高宗)의 양위(讓位) 소식을 듣자 그는 개인의 일보다 나라를 위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7월 도산(島山) 안창호       (安昌浩)선생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단발, 금연, 금주를 단행하고 민족을 위해       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먼저 용동(龍洞)에 소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워 신교육(新敎育)을 시작하고 그 해 12월 24일에 "오산학교       (五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중심 인물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사회사업에도 눈을       돌려 신민회(新民會)에 강비하고 평북(平北) 총감(摠監)으로 활약하며 서적 출판 및 판       매회사인 태극서관(太極書館)의 관장도 역임하여, 민족 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결       사 운동을 시작하였다.

 

46세 (1909)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사장이 되었으며, 회사의 이익으로는 오산학교의 학생들을 키        우고 철저한 민족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 이 해에는 오산학교와 남강의 이름이        알려져 정주역에서 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47세 (1910)

 

      한일합방이 되자 많은 인사와 지도자들은 광복 운동과 국권 회복을 위하여 해외로 망명        하였다. 그러나 남강은 끝까지 국내에 남아서 신민회 사업과 교육 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이는 나라 잃은 후회와 설움에 잠기기 이전에 나라의 힘이 약해져서 남에게 빼앗기게 된        원인을 살피고 다음 시대를 준비하려는 예언자적 태도라 하겠다. 한편, 남강은 9월에 평        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용동에 돌아와 학        교 옆에 교회를 지은 다음, 학교의 교육 주지도 기독교 신앙으로 하고 기독교 정신을 바        탕으로 민족 교육을 하며 또한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고심 분투하였다. 그러나 남        강의 이런 일련의 노력에 대해 일본인은 따가운 눈초리로 주시하다가 급기야는 남강의        자기회사도 강탈하였으며 남강마저 제거하려는 시기만 노리게 되었다.

 

48세 (1911)

 

      南岡은 2월, 서울에 기다가 경찰의 불심 검문에서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의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1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를 당한다. 이때, 안명근은 종        신 징역형을 받았고, 그 외에도 많은 인사가 이유 없이 감옥에서 고생을 했으나 南岡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에 유배만 되었다. 그러나, 남강은 제주도에서도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 새로운 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교육과 문화 사업을 일으켰고        급기야 일본은 그들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남강을 얽어매어 다시 서울로 압송하고 구        속하였다.
       이 때에 일본은 우리 나라 안에 있는 반일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많은 인사들을 갖가        지 구실로 구금하였는데 안명근의 무관학교 사건이나 105인 사건이 그것이었다. 南岡도        105인 사건의 주모자라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다른 5명과 같이 10년형을 언도 받았다.        南岡은 나중에 회고하기를 "제주도 유배로부터 가출옥될 때까지의 5년 동안 비록 육체적        으로는 쇠잔되었지만, 성서를 탐독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수양을 쌓아 정신적으로는 더욱        강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52세 (1915)

 

      南岡은 2월에 가출옥하자 곧 세례를 받고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54세에는 그 당        시 극소수에 불과하던 교회 장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1817년 8        월 21일에 장립식) 그래서, 감옥에 있는 동안 흩어졌던 주변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南        岡을 중심으로 뭉쳐 민족 운동과 개화운동을 하며 오산학교의 건물을 새로 짓고 후진 양        성에 힘쓰게 되었다. 그리고 국외의 많은 지도자들과 서로 연결하여 국내의 책임자적인        위치에서 조국의 광복과 독립 운동을 계획하였다.

 

56세 (1919)

      1919년은 3.1 독립 운동이 일어난 해다. 2월 28일 천도교측 대표인 손병희과 최린, 기독        교측 대표인 남강과 함태영, 불교측 대표인 한용운등 33인 서명을 통하여 준비된 독립 선        언문은 3월 1일 오후 1시반 경 태화관에서 낭독되었고, 파고다 공원에서는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南岡은 이 일의 전체적인 중심 인물로 준비와 진행을 맡아서 했        으며, 만세 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다른 민족 대표들과 함께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南岡은 대표들 중 최고형인 3년형을 언도 받아 3번쨰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한편, 일본인들은 같은 해 3월말에 독립 운동의 중심 진원지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오산        학교와 오산 건물을 소각, 폐허화하고 폐교시켰다.

 

59세 (1922)

 

      南岡은 7월 21에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과 관계자 15인등 48명 중 마지막으로 경성 감        옥에서 가출옥했으며 옥고를 치르느라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정양하기 위해 잠시 휴        양을 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지도자를 필요로 하던 때라, 다음 해에 이상재, 유진태 등        과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여 전국의 사학 교육을 지도하는 등 계속 그의 뜻을 펴 나        갔다.

 

61세 (1924)

 

      南岡은 회갑을 맞아 이때부터 그는 더 성숙되고 깊이 있는 민족정신으로 일하였는데, 5        월에는 '민족의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일보의 제 4대 사장이 되어 일제에 맞서 민        족의 언론 창달에 힘썼다. 또한, 조만식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여 국내외 투쟁에        앞장서서 일하기도 하였다. 한편, 3월 南岡의 회갑을 맞아 오산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되        어 南岡의 약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약전은 출판되자마자 일본 정부에 의해서 당국의 정        책과 어긋난다 하여 고스란히 압수되기도 하였다.

 

63세 (1926)

 

      南岡은 이해 가을부터는 직접적인 사회 활동을 줄이고 용동에 내려와 오산학교를 중심        으로 종합 교육 계획과 오늘날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대 이상향 건설에 몰두하였다. 이        때에 전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주의 사조를 염려하였고 일본의 지배속에 세속화, 형식화        되어 가는 교회를 걱정하며 오직 1907년에 세웠던 그의 결심을 실행하려고 모든 노력을        하였다.

 

67세 (1930)

 

      南岡이 65세(1928)가 되던 해에는 졸업생들이 모교(母校)에 모여 오산학교(五山學校)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남강의 동상(銅像)을 세우기로 하고 제작에 착수하였다. 동         상은 2년 뒤 67세가 되던 해 5월 3일에 오산학교 교정에서 제막 되었다.

        이 일도 물론 南岡 처럼 총독부의 반대가 컸으나 단순히 교육자의 동상으로서 자기가 설         립한 학교 교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겨우 승낙을 얻었다. 그러나 세우고 보니 남강의         동상은 단순히 한 개인의 銅像이 아니라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싸운 오산학교의 기상과         신민회, 105인 사건, 독립 선언 등의 많은 고난을 이기고 투쟁을 계속한 민족 지도자이         자 독립 운동가의 정신과 상징이 서리어 있었다.

        그러나 南岡은 이러한 민족의 존경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여러해의 옥고와 바쁜 생활로         인해 그렇게도 강인하던 체력을 거의 상실하여 마침내 5월 9일 새벽 4시에 협심증으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南岡의 장례식은 5월 17일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하였는데         유해(遺骸)는 선생의 유언대로 서울로 운구되어 해부(解剖)를 하고 학생들을 위한 생리         표본(生理標本)으로 철제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렇지만 일본은 南岡의 최후 유언마저 허         락하지 않고 학생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자극이 된다고 하여 그 뼈를 강제로 수습하여     五山學校 뒷산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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