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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100년사
1. 창립기

오산학교가 터를 잡았던 관서 지방은 역사적으로 누대에 걸쳐 지역적 차별 대우에 시달려 온 서북민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구한말에는 청일전쟁(1894)의 와중에서 그 피해가 어느 곳보다 많았던 지역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우리민족의 대륙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서 선진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이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 근대화의 여명기에도 서구 근대 문명과 기독 문화가 어느 지방보다도 먼저 들어와 있던 곳이기도 하였다.을사조약(1905)으로 망국의 설움에 잠겨 있던 서북민들에게 이 새로운 시대는 떨치고 일어나 나라와 겨레의 발전을 이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같은 시대의 조류를 바로 깨달아 독립의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힘을 시급히 길러야 하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도산 안창호(島山安昌浩)와 당대 최고의 경제인으로서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인해 경제계에서 물러나 있던 남강 이승훈(南岡李昇薰)의 만남으로 오산학교는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교육 입국의 횃불을 올리게 되었다.
즉, 국가 흥망의 갈림길에서 의병과 국채 보상 운동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던 1907년 12월 24일, 남강 이승훈에 의해 오산학교는 단 일곱명의 학생으로 창립되었다.


[1919년 당시의 화재]

1909년 3월 2일 순종 황제는 일본 통감 이토오와 함께 전국 순행민정 시찰 도중 정주역에서 남강의 교육 공로자로서의 노고를 치하하고 표창하였다. 이때 각 지역에서는 군중과 학생들이 모두 태극기와 일장기를 들고 환영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주역에 환영 나온 오산 교직원과 학생들은 태극기만 들고 있었다. 군중들이 처음에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결국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고 모두 일장기를 버렸다. 태극기만 들고 황제 일행을 환영하기는 평양 대성학교와 오산 학생들뿐이었다. 이는 당시 애국 계몽 운동의 중심체로서의 학교다운 역할이자, 오산 항일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오산학교는 역경에 처할수록 힘을 내는 학교다. 오산학교는 학교의 기둥인 설립자 이승훈이 신흥 무관 학교 사건, 105인 사건, 3·1운동으로 인해 한 번의 유배와 세 번의 옥살이로 전후 9년의 옥고를 겪는 아픔에도 굴하지 않고, 1919년 3월의 강제 폐교와 두 번의 화재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 은근과 끈기의 상징적 학교라 할 수 있다. 교사진은 1918년 무오(戊午)독립 선언의 주인공이며 민족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른 정열적인 민족애의 소유자 시당 여준(是堂呂準), 과학적 두뇌의 소유 자이며 씨알사상과 독실한 기독 신앙심을 퍼뜨리고 사상가 함석헌(咸錫憲)을 길러낸 다석 유영모(多夕柳永模), 교가, 창립기념가, 졸업식가, 동문회가, 오산 경가(五山景歌) 등을 짓고 초창기의 학교 교무 행정의 체계를 세운 춘원 이광수(春園李光洙),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자 민족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丹齋申采浩),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염상섭(廉尙燮)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용솟음치는 온갖 정성을 쏟아 학생들을 가르쳐 민족의 힘을 키우는 구국 인재를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


[1925년 무렵의 체조 수업]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친 창립기 오산의 졸업생으로는 3·1운동 때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독립 운동가 김도태(金道泰·1회)와 김지환(金智煥·.2회), 도쿄 2·8 독립 선언의 주역인 언론인 서춘(徐椿·3회),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고 독립 선언서를 영역(英譯)하여 세계에 알린 신우철(申禹澈·4회), 천재 시인 소월 을 기른 단역문학의 비조 안서 김 억(岸曙金億·4회), 초창기 서양 의학계의 태두로서 백병원을 설립한 백인제(白鱗濟·6회), 신사 참배에 대한 항거에 앞장서 순교한 한국 기독교의 양심 주기철(朱基徹·7회), 남강 사후 오산의 기둥이자 재건 오산의 주역 동광 주기용(東光朱基瑢·7회),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의용군 사령관, 군인으로서 육사 교장, 정치인으로서 신민당 당수를 역임한 김홍일(金弘壹·9회), 한국 기독교의 기둥으로서 영락교회를 창설한 한경직(韓景職·10회), 조선일보 주필과 회장을 역임하고 등산을 스포츠화한 언론인 홍종인(洪鐘仁·11회), 우리 나라의 대표적 서정시 진달래꽃'을 지은 민족 시인 소월 김정식(素月金廷湜·12회), 현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민주, 민권 운동의 대표적 양심 함석헌(13회), 토속 서정 시인 백석(白石,18회) 등이 있다.

3·1운동의 민족 대표로 독립을 선언한 남강의 뜻에 부응한 1,200여 명의 학생들은 3월 2일 학교에서부터 행렬을 이뤄 고읍역까지 진출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놀라 급파되어 온 정주 경찰과 평양 수비대의 호위 아래 일제 헌병들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라 하여 오산학교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학교는 잿더미로 변하고. 교장 조만식을 비롯한 많은 학교 관계자와 학생들이 구속되는 등 혹심한 수난이 뒤따랐다. 이 폐허 속에서 감옥에 갇힌 남강을 대신하여 약관 23세의 노호 김기홍(蘆湖金起鴻)은 학교의 주춧돌을 다시 놓았다. 그는 당시7,000원의 거금을 쾌척하여 오산학교를 재건하였다.

1929년 11월의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일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선우기성(獻于基聖), 임창원(材昌元), 신기복(申基福)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교생이 참가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500여 학생들은 칼을 빼든 일본 순사를 때려 눕히고, 고읍과 정주까지 진출하여 마음껏 독립 만세와 교가를 불렀다. 그 후 다시 출동한 일제순사에 의해 90여 명이 검거되고 37명이 구속되었으나, 독립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막기 위한 일제의 수습 정책에 의하여 세 학생만 재판에 기소되어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4년의 언도 끝에 제적되었다. 오산학교는 1985년 2 월, 55년만에 이들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여 그 정신을 기리고, 다소나마 한을 풀게 해주었다.

창립기의 오산학교는 오산의 얼이자 겨레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남강 이승훈과, 오산의 주춧돌이자 겨레의 등불이라 할 수 있는 고당 조만식(古堂曺晩植)에 의해 그 독특한 민족 학교로서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즉, 남강은 지극한 민족애로, 그리고 고당은 꺾을 수 없는 높은 지조와 예언자다운 인격으로 학교를 이끌고 밀었다.

2. 형성기
이 시기는 노호 김기홍과 동광 주기용이 1930년 서거한 남강과 192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교장직에서 물러난 고당의 뒤를 이어 학교를 이끌던 때다.일제는 이 시기에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사변( 1931년),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켜 우리 국토를 병참 기지화하고, 마침내 태평양전쟁(1942)을 도발하고 우리 겨레를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우리말의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강제징용과 징병 등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 현장에서도 소위 식민 교육정책에 의해 조선어와 조선사 과목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오산학교에서는 조선어와 조선사 수업을 계속 강행하고, 학생들에게도 조선어를 사용하게 하였 다. 그러자 일제는 오산학교의 겨레 사랑과 독립 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민족혼의 구심점으로서 교정에 세워져 있던 남강 동상을 강제로 철거 하여 전쟁 물자로 징발해 가고, 또 남강 묘비를 훼손하고 매장해 버렸다. 마침내 일제는 오산학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1942년 이른바 혈맹단사건을 조작하여 교사와 수백 명의 학생들을 구속 수감하고, 교장 주기용을 강제 면직시킨시킨 후 일본인 이토오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교가, 교훈, 교표 등에 담긴 겨레 사랑의 정신을 없애기 위해 이들을 강제로 개정시켰다.

[개교30주년기념 솔문]

[ 영 어 수 업 ]

[남강에 대한 경례]

오산학교는 1907년 설립 이후 1909년 4년제 중등 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식민지 교육의 강화를 목적으로 1922년 공포된 조선교육령에 따라 1926년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일제는 등보통학교로의 승격 인가를 조건으로 교장 조만식의 사퇴와 일본어 교육 및 일본인 교사의 채용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오산학교에서는 전문 학교와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지는 고등보통학교로의 승격인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일제가 강요한 전제 조건을 거부하고 민족 교육의 전통을 유지하느냐를 놓고 3년간의 논란이 있었다. 결국 이 논란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중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남강의 '우리도 시세(時勢)에 따르는 것같이 보이면서 먼 장래를 기다리자는 결심에 조만식도 반대하지 않아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의한 고당의 교장직 사퇴 강요는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동맹 휴학 등의 거교적인 저항으로 말미암아 철회 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승격 과정에는 1922년부터 1926년 사이에 졸업한 학생들이 상급 학교 진학 자격을 얻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1922년 제12회 4년제 졸업생인 소윌 김정식이 상급 학교 진학 자격이 주어 진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이미 승격된 배재고보에 편입학한 후 졸 업하게 된 것도, 오산학교의 민족주의 교육 전통을 지키기 위해 벌인 일제에 대한 3년 간의 저항과 관련되어 있다.

오산고등보통학교는 1938년에 공포된 새 교육령에 따라 1939년 일본인 중등학교 명칭인 오산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이는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일본인과 동등한 교육을 실시한다는 표면적 이유 아래 전개된 노예화 교육의 일환이었다.

일제의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 교육이 기세를 떨친 이 시기에도 오산의 민족 교육은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다. 정식 과목에서 제외된 조선어 교육에는 일생동안 한복만을 입고 조선어 사랑을 학생들에게 심어 준 철저한 민족주의자 이탁,이근칠(李根七) 등이 힘썼다.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역사의 전환과 광복의 여명을 예언적으로 가르치고, 성자다운 몸가짐과 곧은 지조로 학생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함석헌. 남강을 새롭게 인식시킨 전기 '남강 이승훈'을 저술한 김기석(金基錫), 대향 이중섭(大饗李仲燮)을 키운 미술 교사 임용 련(任用璉) 등은 오산학교를 일제가 말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집단, 즉 겨레 사랑에 헌신하는 민족 학교로 만들었다.

오산의 예술로 승화시킨 '소'의 화가 이중섭(25회), 일제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제3지대 공작 책임자로 일본군 점령 지역에 잠입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서 일본어의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며 순국한 한성수(韓聖洙 ·28회), 학도병을 탈출하여 조선 의용군과 광복군,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국군 기병대 대장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 중부 전선에서 산화한 일명 장철부(張哲夫)로 알려진 김병원(金秉元·30회), 1944년 졸업 이후 일본어를 단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최연소 광복군으로 활약하다가 광복 이후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현 광복군 동지회 회장 김영일(金 永逸·33회) 등의 졸업생이 오산 정신을 빛냈다.


[ 고 별 식 모 습 ]

평양고보 재학 시절 일본인 교사들에게 하대(下待)말과 욕지거리 등의 차별 대우를 받던 함석헌은 3·1운동 참가후 학교를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편입하였다. 이 때, 면담을 하던 교장서리 김이열(金彛烈)이 존대말로 학생을 대하는 데 감격하여 '거적 깔린 교실 바닥에서 책상도 없이 공부하고 있는 오산학교야말로 학생을 사람답게 키우 는 곳이구나' 하고 입학을 결심하였다 한다.

일제의 방화로 인해 이시 기의 오산학교는 이처럼 열악해진 환경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가득 넘쳤다.

형성기에 접어든 오산학교는 그러나 1934년 대화재로 인해 일대 위기 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창립기를 거치면서 이룩한 민족 학교로서의 전통과 위상에 힘입어 거국적인 재건 운동을 일으킬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적극적 호소와 관서지방민 등의 거족적인 성읜과 교사, 학부모, 학생, 졸업생등의 애교심이 하나로 뭉쳐 재건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리고 생전에 남강이 왜놈에게 농락당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일본 총독과 교섭하여 마련한 박천(博川)의 갈밭이 기초가 되어 재단이 튼튼해진 오산학교는. 10만 평의 부지 위에 최신 스팀 난방 시설이 완비된 연건평 7백평의 븐관, 제2교사, 과학관,
유도장, 도서관, 실내 체육관, 국제 규모 5Om 8코스 수영장, 실습장, 과수원, 동대문 운동장 넓이의 운동장이 들어선 한국 최고의 시설과 규모를 갖춘 학교로 다시 발돋움 하였다. 또한 군수 원급이 60원이었던 그 당시에 교사의 초봉이 95원에 이를 정도로 재정 형편이 좋아져 훌릉한 교사진을 갖추고 장래의 민족 동량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일제의 횡포와 강압. 그리고 대화재 등의 재난을 무릅쓰고 학교를 다시 우뚝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남강과 고당, 노호, 동광을 비롯한 선각자적인 교사진의 투철한 민족애와, 이에 감응한 동포들의 헌신적인 후원에 힘입어 가능할 수 있었다.

3. 시련기

1945년 일제의 무조건 항복 이후, 우리 미군과 소련군 진주로 국토가 양분되고,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분단이 고착되었다. 곧 이은 1950년 6·25 전쟁과 1953년의 휴전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숨가쁜 역사의 소용들이가 휘몰아쳤다. 오산학교도 이 소용돌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8·15광복을 맞아 일본인 교장이 물러나고, 주기용이 교장으로 재취임하여 일제의 잔재를 씻고 옛 오산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1945년 11월 반공의거 건으로 교장 주기용이 구속되고 북한 지역이 공산화되어 공산주의자 교장이 들어서자 노호 김기홍과 동광 주기용 등 오산 관계자들도 줄을 이어 정든 고향과 오산을 등지고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11월에 일으킨 반공 의거는 공산체제에 항거한 북한 지역 최초의 학생 의거였다. 교장 주기용을 제거하며 오산학교를 공산주의 이념의 학교로 재편,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음모를 전해 듣고 학생들이 격분해 있던 중 러시아 혁명기념일 행사에 오산 밴드부를 강제 동원하려하자 4학년 150명 전원이 11월 6일 정주 고읍의 공산당 각 기관들을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 때 구속된 주모자급 학생들은 교장의 보증으로 풀려났으나, 공산 당국이 다시 교장을 구속하자 13명의 학생들이 혈서를 쓰는 등 석방 운동을 적극 전개하여 결국 교장도 석방되었다. 이 일의 전말이 신의주 동중학교에 본부를 둔 평북 학생회에 알려지게 되어 신의주 소재 학교의 학생들도 일제히 궐기하여 마침내 압록강 물을 피로 물들게 한 1943년 11월 의 신의주 학생 반공 의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산 학생들은 1947년 5월 23일에도 반공 의거를 일으켰다. 당시 공산 당국은 교장 주기용을 해임하고 공산주의 앞잡이 전의원을 교장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들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전의원과 일부 교사 및 민청파 학생들에 항거하여 학교를 제 모습대로 바로 세우려 하였다. 반공 민족주의자 교사들과 학생들은 정주 보안서까지 쳐들어가며 과감하게 귈기했으나 소련의 뒷받침 아래 도도히 전개된 북한의 공산화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주모자 박승종 등 20여명의 학생들과 민족주의자 교사 들은 체포, 구속되고 대부분의 오산 관계자, 교사, 학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되었다.

당시에 반공 이념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공산 당국에 의해 쫓겨난 민족주의자 교사로는 경희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학술원 회원 이근칠(20회), 헬싱키 올림픽 레슬링 국가 대표팀 감독이었던 현 학교 법인 이사장 김옥규(金玉圭·23회), 경희대 교수와 오산 학교 교장을 역임한 고한권(高漢權), 반공교육의 최선봉에 섰다가 신의주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현 학교 법인 이사 김봉빈(金鳳彬· 26회), 오산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한 평생을 바친 임상흠(林相欽 ·27회) 등 20여 명이 있었다.

한편 오산학교의 졸업생들도 반공 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1947년 1윌 압록강변 청성진 출신이 주축이 되어 중국 국부군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반공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청성진 보안서를 습격하였다. 이 의거로 김홍제(35회)는 목숨을 잃고, 한익룡(29회), 심 창휘(32회), 김옥섭(33회) 등은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는 수난을 당하였으나 김영록(35회)은 다행히 월남에 성공했다.

1950년 12월 오산 출신들과 정주 지역 애국 청년들은 서해의 애도 (艾島)를 거점으로 유격백마부대를 결성하고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 부대는 유격전을 전개하여 북괴군의 시설과 보급로를 파괴하고 수많은 북괴군과 중공군을 사살하는 등, 적 후방을 교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공산 통치에 감연히 항거하여 재학생들이 일으킨 두 차례의 반공 의거와 졸업생들의 청성진 보안서 습격 사건과 유격백마부대의 활동 등은 오산에서 가르치고 오산에서 배운 대로 민족을 구하고자 행한 몸부림이었다. 이리하여 항일 민족 학교라 불린 오산학교는 시련기를 거치면서 반공 민족 학교라는 또 하나의 명예를 얻게 되었다.

4. 재건기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동족 상잔의 6·25전쟁이 1951년 1·4 후퇴를 고비로 소강 상태에 접어들고 휴전 회담이 열림에 따라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돌아갈 날을 기약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때마침 1951년 2월 정부에서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노호 김기홍, 동광 주기용 등 오산 관계자들은 오산학교의 재건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8월 15일 동창회장 김홍일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부산 송도에서 동창회가 열려 학교를 재건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52년 3월 1일 재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학교 건축을 돕는 학생들 모습]

[보광동 신교사를 기공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오산의 재건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나 일제 때 오산학교에서 음악과 체조를 가르쳤던 부산 태생의 김성곤(會聖坤)이 학교 대지로 3,000평의 땅을 기부하고, 오산소학교를 졸업한 노응석(盧應錫)이 노호 김기홍을 찾아가 그 전재산인 1,000만환을 쾌척하여 재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후 최태섭(崔泰涉), 조병덕(趙秉德), 김 척제(金倜濟), 김기석, 이근칠, 김옥규, 허순오(許順五·30회) 등 동창과 사회 유지들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노호와 주기용, 김홍일이 중심이 되어 부산시 동대신동 산 4번지에 건평 300평의 새 교사를 건립하고, 1953년 4월 25일 중학교 4학급과 고등학교 2학급 등 모두 6학급으로 오산학교를 재건하였다, 입학생의 대부분은 오산의 개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월남 학생들이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자 오산학교도 정부의 서을 환도에 따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 300평의 교사를 마련, 학교를 이전하고 1954년 4월 16일 400명의 학생으로 개학을 하였다 그런데 부산 분교 학생 200명의 뒤이은 상경으로 말미암아 교실이 부족해져서 원 효로 전차종점 나대지에 천막 교실 5동을 새로 마련하는 한편, 주변 빈 땅을 체육 활동을 위해 서울시로부터 임대하는 등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려고 힘썼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열악한 교육 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1955년 11월 26일 지금의 터전인 보광동에 대지 2만평을 마련하고 1955년 11월 26일 본관 교사 기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교사 신축을 위한 토목 공사와 건축 자재의 조달에는 남강과 인연이있었던 당시 육군의 참모차장 이응준과 2군단장 장도영 등의 도움이 컸다. 그리고 미8군의 원조도 일조하였다. 이 때 재학생들도 남강의 후예로서 교사 건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1956년 4월 보광동 주민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콘세트 교실 6동이 임시로 설치된 보광동으로 학교 이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7년 5월 15일 뜻깊은 개교 제50주년을 맞아 본관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보광동 신교사의 건립에는 건축비를 지불하지 못하여 학교가 고초를 겪을 때에 동창회와 정주 유지들의 권유에 따라 이사장직을 맡은 최창학(崔昌學)의 재정적 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학원 경영면에서 교장 주기용과 갈등을 겪던 중에 1959년 10월 급환으로 타계하자 오산 재건의 아버지 노호 김기홍이 다시 이사장 직을 맡았다.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와 3·15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오산학교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여 부상 학생이 속출하자 4월20일부터 휴교에 들어갔다.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는 시위대의 선봉에 섰던 이성화(李盛和 ·51회)는 경무대에서 이루어진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에 고등학교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1961년 오산 교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교장 주기용이 정년 퇴임하였다. 퇴임 후 그는 이사장 직을 맡아 1964년 남강 탄신 제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남강의 일대기를 서술한 '남강 이승훈' (김 기석 지음)을 간행하였다. 주기용은, 1930년 교원 부임 이래 학교의 온갖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민족 학교의 전통을 가꿔온 오산의 한 기둥이었다.

5. 도약기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 시작되고 나라는 바야흐로 국운 상승기에 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오산학교는 1957년 보광동 교사 본관의 준공 이후 꾸준히 크고 작은 교육 시설 들을 확충해 나가는 가운데 보다 안정된 교육 환경 속에서 교육활 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학교로서, 공산 치하에는 반공 학교로서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 활동을 펼쳐온 오산학교는 도약기를 맞아 밝고 덕스럽고 힘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이의 구현을 위해 인간의 품성 도야와 진리의 탐구, 그리고 건강한 신체의 단련을 아우르는 전인 교육(全人敎育)을 전개하였다.

오산학교는 인문학교로서 대학 진학률의 향상에도 힘을 쏟는 한편, 보다 진취적인 새로운 교육 방식의 도입에 앞장섰다.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 흥사단에서 도산과 함께 일했던 김여제(金與濟 ·2회)는 일찍이 1931년 교장에 취임하여 일제 당국의 강압을 무릅쓰고 학생의 자율권을 대폭 신장하는 미국식 교육 방식을 도입한 바 있었다. 1963년 교장 박희병(朴熙秉)은 우리 나라 중등 교육사상 최초로 완전학습 이론에 바탕을 두고 학습자의 수학 능력을 감안한 능력별 학급을 편성 운영하였다. 또한 그는 실용주의 교육 이론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한 직업 교육에도 힘써 자동차반, 전기반, 원예반 등의 학급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생업 주간(生業週間)을 설정하여 전교생이 산업 현장을 견학하고
자신의 진로를 실질적으로 모색하여 산업화 시대의 도래에 대비 하도록 하였다.


[체육과 수영 수업 ]

[이동 도서관 운영]

한편 1958년 창단된 수영부와 송구부는 여러 해 동안 전국 대회를 석권하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1970년 새로 부임한 교장 나동성(羅東星)은 계획적인 조경과 환경 개선 사업을 꾸준히 전개하여 오늘날처럼 아름다운 교정을 가꾸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그는 신관, 서관, 동관을 잇따라 건립하고 도서관, 과학실, 체육실, 강당 등의 학교시설을 획기적으로 확충하여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학급 증설에 대비하였다.

1974년에 단행된 고등학교 평준화 시책에 따라 신입생 선발 제도에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 대부분의 고등학교가 학교 고유의 교풍을 상실하고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위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인하여 중등 교육은 인격 형성을 돕고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길러 주어야 할 본연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오산학교는 학생들의 인격 도야와 적성에 맞는 능력의 향상을 돕기 위해 각종 클럽 활동과 봉사 활동을 활성화하는 등 전인교육에 힘썼다.

1983년 고등학교는 여학생 3학급을 배정 받아 남녀 공학을 실시하였다. 이 남녀공학은 7년간 이루어지다가 여학생의 감소에 따라 1990년 남학교로 복귀하였다. 80년대 중반에는 중학교 36학급, 고등학교 45학급이 편성되어 총학생수가 5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 후 도심 인구의 분산으로 인해 중학교는 1987년부터 24학급을, 고등학교는 1993년부터 30학급을 유지하게 되었다.

1984년 나동성에 이어 부임한 교장 전제현(全濟鉉·36회)은 중학교장 정원경(鄭元京·33회), 김종영(金鐘永·48회)과 함께 장기적인 학교 발전 계회을 수립하고 동창회를 비롯한 학교 유관 단체들의 후원을 얻어 남강 정신의 구현을 위한 여러 사업을 펴는 한편, 오산 교육에 면면히 계승되어 온 사사교육(事事敎育), 처처교장(處處敎場), 솔선수범(率先垂範)의 교육 방법을 통한 전인 교육의 심화에 진력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오산학교는 이른바 일류 대학 진학생수에 연연하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야영 훈련, 동계 지도자 수련, 모자간의 대화 등의 각종 수련 활동과 인성 교육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전교사를 대상으로 한 해외 연수를 연차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1984년 남강의 기독 신앙을 되살리기 위해 기도실을 개설하고 교목(校牧)을 초빙하였다. 또한 남강의 제주도 유배처 인근의 조천중학교와 일본 에이신(盈進)고등학교 중국 흑룡강성 치치할시 조선족 중학교 등과 자매 결연을 하였다.

1980대말 세계 공산권의 몰락에 따라 우리 나라는 통일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오산학교는 통일 오산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 정기적인 남강 통일 강좌를 개최하고,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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