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큰 일꾼 '남강 이승훈 89주기' 추도식

민족의 큰 일꾼 '남강 이승훈 89주기' 추도식

국제뉴스 원문l 입력 2019.05.09 22:56|더보여z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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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희영 기자) 남강 이승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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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 근대교육 선구자뮌 이튼 '오산학교' 설립

학교 운영 위해 세간 살이 팔고 제집 기왓장 벗겨 깔아

이광수. 신채호 등 교사로 모시고 김소월. 이중섭 등 배출

졸업생 역사가 그대로 민족운동과 사상. 예술의 배경 돼

(서울=국제뉴스) 안희영 기자 = ()남강문화재단(강용익 이사장)9일 능동 어린이대공원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 앞에서 그의 서거 89주기 추도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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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문화재단 강용익 이사장

남강 서거 89주기 추도식에는 남강문화재단 이사장, 지방보훈청, 오산학원 이사장, 오산고교 이사장, 남강 유가족, 현 남강 중 고등학교 학생대표 및 교직원 등이 참석을 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주체적인 근대교육의 선구자'로서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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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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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희영 기자)



다음은 남강기념관의 사료를 통해 남강의 3.1운동과 100년 미래교육의 사상과 실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강은 신민회 운동(=105인사건) 3.1운동 등으로 모두 세 차례의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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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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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 상황 속에서 남강은 세속적 비난을 두려워 않고 스스로 민족을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주저 없이 실천에 옮겼다.

그것이 오산의 역사를 만들어낸 힘이 되었다.

19077월 남강선생 고향인 용동에 소학교인 강명의숙을 설립하였으며 19071224일 오산학교(4년제)로 개교하였다.

2007515일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교훈은 '사랑, 정성, 존경'이며 교목은 잣나무, 교화는 무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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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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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희영 기자)

 



남강기념관에는 그의 흔적들을 면밀히 볼 수 있는데 한국 근현대사에도 이튼에 필적하는 학교가 남강의 오산학교다.

오산학교가 배출한 교사 명단에는 춘원 이광수와 고당 조만식, 다석 유영모를 비롯해 단재 신채호, 벽초 홍명희 등이 있다.

또한 김억, 서춘, 김여제, 백인제, 주기철, 한경직, 김홍일, 함석헌, 홍종인, 김기석, 주기용 뿐 아니라 김소월과 이중섭, 백석, 이기백 등을 배출함으로써 오산학교 졸업생들은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사상과 종교, 예술, 역사의 뿌리를 내렸다.

남강 이승훈은 교육사상의 저작을 남긴 적도 없고, 학문과 식견의 소유자도 아닌데, 근대 지식인에게 필수 요건처럼 돼 있는 외국 유학은커녕 학교다운 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다.

그는 1864년 평안도 정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한 살 나이에 남의 상점에 사환으로 들어가 험난한 삶을 시작했다.

어릴 적 그의 이름은 인환, 그의 성격은 성실과 정직함이었으며 청년시절 조선 최고의 장사꾼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모은 재력으로 일가와 친척을 양반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민중이 억압과 침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인환은 이름을 승훈으로 바꾸면서 남강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고향 마을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서당을 폐하고 강명의숙이라는 신식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근대 학교 오산학교를 창시했다.

남강은 전근대교육에서 근대교육으로의 과도기적 교육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그가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안목 있는 이를 오산의 교사로 모셨고 학교 운영을 위해 자신의 전답을 아낌없이 팔아 교실을 짓고, 기와가 모자랐을 때에는 자신의 집의 기왓장을 벗겨와 교실 증축에 기꺼이 쓰이게 했다고 한다.

남강의 동상제막식 며칠 후 그는 갑자기 협심증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기 직전 내 뼈는 표본으로 만들어 학교에서 사랑하는 학생들에게도 보여주고 교육에 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기 바란다고 유언을 남긴다.

193059일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경성제대 병원으로 옮겨져 살을 빼고 뼈를 표백해 표본으로 만드는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갑자기 총독부는 이 모두를 강권으로 금지시켜 표본 제작을 저지했다.

남강의 죽은 뼈가 살아있는 식민 권력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다.

그의 백골은 결국 유리항아리에 담겨 다시 정주로 돌아와 오산의 서쪽 산에 묻혔다.

비록 남강의 유언은 실현되지 못했고 아직도 그의 유해는 표본으로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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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남강의 어록으로 현대인에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언 중에서)

낙심하지 말고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오산학교 학생들에게 많이 하신 훈화)

부지런 하라.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라.”

(1929년 동상 제막식의 답사에서)

나는 어려서 빈천한 가정에 태어나 글도 변변히 못 읽고 여러 가지 고생을 했는데 오늘 이같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은 내게는 너무나 넘치는 일입니다.

내가 민족이나 사회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한 일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후진이나 동포를 위하여 한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상처를 입었으면 저런 동상은 몇 백 개를 세워도 참된 영생이 못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물질적 영구성을 구하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오래 살 바를 찾기를 바랍니다.

(남강과 오산학교의 발자취)

1907.07.01. 남강선생 고향 용동에 소학교 강명의숙 설립(7)

1907.12.24. 오산학교(4년제) 창립(1224)

1915.05.15. 5대 교장 고당 조만식 취임

1910.03.01. 춘원 이광수 부임

1925.05.15. 10대 교장 조만식 취임

1928.05.15. 함석헌 선생 부임

1930.05.09. 남강 서거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74.10.03. 남강동상 제막식

1982.10.03. 남강 탄신 118주년 기념식 및 흉상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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